한 통신 인프라 제안서를 검토하던 중이었습니다. 기술 파트가 작성한 슬라이드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.
"현재 망은 1차 백업 구조인데, 저희는 여기에 2차 백업을 추가합니다."
"지중화율 95%를 확보합니다."
"추진전략 1, 2, 3, 4, 5."
전부 사실이었고, 기술적으로도 훌륭한 내용이었습니다. 그런데 정작 이 슬라이드를 몇 번을 다시 읽어도, 이상하게 와닿지가 않았습니다. 왜 이 스펙이 우리에게 필요한지, 정작 중요한 그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.
그래서 같은 내용을 이렇게 바꿔봤습니다.
"화재·정전 같은돌발 상황에도 서비스가 끊기지 않도록, 2차백업을 구성합니다."
"인입구간 단선이라는 실제위험을 고려해, 이 구간만큼은 무선으로 한번 더이중화합니다."
"고객이 실제 겪는문제 1, 2, 3."
바뀐 건 숫자도, 기술도 아닙니다. 같은 사실을 "우리가 무엇을 했는가"가 아니라 "평가위원에게 무엇이 좋은가"로 바꿔 말했을 뿐입니다.
같은 사실, 다른 언어
왼쪽과 오른쪽은 같은 사실을 말합니다. 다른 건 관점뿐입니다.
엔지니어의 언어는 "우리가 무엇을 했는가"에서 출발합니다. 스펙, 수치, 절차. 모두 사실이고 다 맞는 말입니다. 하지만 평가위원은 그 스펙 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. 평가위원의 머릿속에 있는 질문은 딱 하나입니다. "그래서, 그게 나한테 왜 좋은가?"
이 질문에 답하는 언어가 평가자의 언어입니다. 같은 스펙이라도 "이게 왜 필요한지", "어떤 위험을 막아주는지", "고객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었는지"부터 말하기 시작하면, 완전히 다른 문장이 됩니다.
이건 단순히 문장을 예쁘게 다듬는 기술이 아닙니다. 관점 자체를 바꾸는 일입니다. 엔지니어가 쓴 문장을 세일즈 문장으로 바꾸려면, 먼저 "이 스펙이 상대에게 어떤 의미인지"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. 그 질문을 건너뛰면, 아무리 문장을 고쳐도 여전히 설명서에 머무릅니다.
우리 제안서에 바로 적용해볼 것
다음에 슬라이드를 검토할 때, 이 세 단계를 시도해보시길 권합니다.
- 슬라이드의 모든 문장에서 "우리는 ~합니다"로 시작하는 문장을 찾는다.
- 그문장 뒤에 "그래서 고객에게 뭐가 좋은데?"를 소리내어 물어본다.
- 답이바로 안 나오면, 그스펙은 아직 세일즈언어로 바뀌지 않은것이다. 다시 쓴다.
기술이 좋은 것과, 그 기술이 좋다는 걸 전달하는 것은 다른 능력입니다. 오늘 소개해드린 세 문장의 차이가, 그 두 능력의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생각합니다.
다음 회차 예고
5화. RFP 행간을 읽는다 — 발주처가 말하지 않은 것
RFP에는 없지만, 발주처가 가장 궁금해하는진짜 질문이 있습니다. 그걸 어떻게 찾아내는지,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.
필립은 기술 파트가 작성한 초안을 세일즈 언어로 다시 쓰는 작업을 여러 프로젝트에서 직접 수행해왔습니다.